·9 min read·AI·

AI의 마법에 걸렸다

몰입의 도파민, 그 끝에 뭐가 있을까

하루 만에 서비스를 만들었다

어제 시간관리 서비스를 만들었다. 웹과 앱, 둘 다.

Supabase에 백엔드를 올리고 Vercel로 배포까지 끝냈다. 앱은 스토어 계정이 준비되어 있어서 바로 제출했다. 클로드 코드로 바이브 코딩을 하니까 진짜 하루 만에 끝났다.

AI 없이 했으면? 최소 2주. 아무리 빨라도 열흘은 걸렸을 거다.

이 생산성은 가히 미쳤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구현하고, 구현하면 바로 배포한다. 상상에서 현실까지의 거리가 극적으로 줄어든 느낌. 창작자에게 이보다 짜릿한 경험이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이 짜릿함에서 벗어나질 못하겠다는 거다.

몰입이라는 마약

칙센트미하이의 『몰입(Flow)』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자기 실력에 딱 맞는 도전을 할 때 사람은 시간 감각을 잃고 완전히 빠져든다고. 그때 도파민이 터지고, 자기 효능감이 치솟고, 세상에서 제일 살아 있는 기분이 든다고.

AI와 바이브 코딩은 이 몰입 상태를 강제로 만들어버린다.

예전에는 코딩하다 막히면 몰입이 깨졌다. 구글링하고, 스택오버플로 뒤지고, 삽질하다 보면 흥이 식었다. 그 좌절의 시간이 자연스러운 브레이크였다.

그런데 지금은 막힐 틈이 없다. "이거 해줘" 하면 된다. 결과물이 쏟아진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빠르게, 때로는 생각한 것보다 잘. 몰입이 깨지지 않는다. 계속 달린다.

몰입이 안 깨지는 게 문제라니, 이게 말이 되나 싶다.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구조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비슷한 경험이 있다.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새벽 4시까지 하고 눈 비비며 학교 갔던 그 시절. 게임을 끄고 싶은데 끌 수가 없었다. "한 판만 더" "이 퀘스트만 깨고." 손이 마우스를 놓질 못했다.

지금 AI와 코딩하는 게 정확히 그 구조다.

클로드 코드가 "구현 완료했습니다. 확인해주세요"라고 말한다. 확인하고 피드백을 주면 30초 만에 수정본이 나온다. "다음 기능도 진행할까요?" 당연히 진행이지. 그리고 또 확인 요청이 온다. 이 루프가 끝나질 않는다.

게임의 "한 판만 더"가 AI의 "이것만 확인하면"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내가 병목이다

지금 내 작업 환경을 보면 좀 웃긴다.

AI 에이전트가 대여섯 개 동시에 돌아간다. 하나는 블로그 글을 쓰고 있고, 하나는 앱 버그를 잡고 있고, 하나는 대시보드 기능을 추가하고 있고, 하나는 데이터 분석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전부 나를 기다린다.

"검토해주세요." "테스트 결과 확인해주세요." "이 방향이 맞나요?"

내가 병목이다. 진짜로. AI는 쉬지 않고 일하는데, 내가 확인을 안 해주면 다음으로 못 넘어간다. 이 사실이 묘한 압박감을 준다. 기다리는 에이전트들이 있으니까 쉴 수가 없다. 마치 공장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선 노동자처럼 — 벨트는 멈추지 않으니까 나도 멈출 수 없다.

AI가 나를 위해 일하는 건가, 내가 AI를 위해 일하는 건가. 이 경계가 슬슬 흐려진다.

마법인가, 저주인가

솔직히 인정하자. 이건 마법이다.

20년 전 개발자가 지금 이 생산성을 봤으면 마법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을 거다. 생각만 하면 결과물이 나오는 세상. 프로그래밍을 모르는 사람도 서비스를 만드는 세상.

하지만 모든 마법에는 대가가 있다.

해리포터에서 가장 무서운 저주는 아바다 케다브라 같은 화려한 게 아니라, 임페리우스처럼 자기도 모르게 조종당하는 거다. 행복하게 조종당한다. 기꺼이 복종한다. 왜냐면 기분이 좋으니까.

AI가 주는 몰입의 도파민이 혹시 그런 건 아닐까.

기분이 너무 좋아서 멈출 수 없다. 결과물이 계속 나오니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면 하루가 가 있다. 밥도 안 먹고 코딩했다. 운동도 빼먹었다. 아이와 놀아주기로 한 약속도 잊었다.

생산적이었지만 정작 중요한 건 하나도 안 했다. 이런 날이 점점 늘고 있다.

도구는 도구여야 한다

망치를 쥐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는 말이 있다. AI를 쥐면 모든 게 자동화할 대상으로 보인다. "이것도 만들 수 있겠는데?" "저것도 되겠는데?" 아이디어가 끝없이 떠오르고, 실행이 너무 쉬우니까 전부 만들어보고 싶다.

하지만 만들 수 있다고 해서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니다.

바로 어제 내가 쓴 글에서 시간 기록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안 할 것을 아는 힘이 중요하다고. 그런데 정작 나 자신이 AI의 생산성에 취해서 안 해도 될 것까지 하고 있었다.

도구가 주인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그건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

조심해야겠다. 진심으로.

이 글을 쓰면서 스스로 각성하는 중이다. AI의 생산성은 진짜 경이롭다. 이 도구를 제대로 활용하면 인생이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도구에 삼켜지면, 바뀌는 건 인생이 아니라 내가 된다.

스타크래프트를 끊었던 것처럼, 경계를 그어야 한다. 에이전트가 기다린다고 해서 밤새 일할 필요는 없다. AI는 기다려도 지치지 않는다. 지치는 건 나다.

몰입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몰입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야 진짜 몰입이다. 빠져나올 수 없다면, 그건 몰입이 아니라 중독이다.


AI의 마법은 강력하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마법에 걸리는 건 좋다. 하지만 마법에 잡아먹히면 안 된다. 지금 나는 그 경계 어딘가에 서 있다. 아마 AI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느낌일 거다.

도구를 쥔 손은 내 손이어야 한다. 도구가 내 손을 쥐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0jin 서명

20년차 개발자. AI 시대의 경험과 인사이트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