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 수 있다는 것과 만들어야 한다는 것
만드는 비용이 0인 시대, 진짜 어려운 건 안 만드는 판단
개발자의 습관
실생활에서 불편함을 겪을 때마다 개발자 근성이 발동한다. 이거 나만 불편한 건가? 아닐 거다. 그러면 만들어야지.
그렇게 떠오른 아이디어를 사이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만들기 시작하면, 짧으면 일주일, 길면 몇 달이 걸렸다. 기획하고, 설계하고, 개발하고, 배포하고. 그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하지만 그중 아직까지 살아 있는 프로젝트는 손에 꼽는다.
홍보를 안 했으니 사람들이 안 쓰고, 사람들이 안 쓰니 나도 안 쓰게 된다. 유지보수는 점점 내 일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결국 서버를 내리는 날이 온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완성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몇 시간이면 된다
AI 시대가 오면서 그 거리가 극적으로 줄었다.
예전에 몇 달 걸리던 것이 몇 시간이면 동작하는 제품이 된다. 완성도도 꽤 높다. SEO, AEO를 신경 쓰면 큰돈 들이지 않고도 사람들이 찾아온다. 버그가 생기면 몇 마디면 수정되고, 새 기능도 말로 설명하면 만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벌써 그런 프로젝트가 여러 개가 됐다.
그리고 이건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이제는 비개발자도 아이디어 하나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과 기술의 장벽이 사라지고 있다.
냉장고 속 반찬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반찬을 한두 개 만들 때는 매끼 맛있게 먹는다. 그런데 이것저것 만들기 쉬워지니까 냉장고가 반찬으로 가득 찬다. 앞에 있는 건 먹는데, 뒤에 밀려난 것들은 잊힌다. 어느 날 꺼내보면 이미 상해 있다.
도구도 마찬가지다. 만들기 쉬워지니까 무수히 많은 제품이 쏟아진다. 비슷한 기능이 여러 앱에 흩어져 있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조차 까먹게 된다. 만들 수 있다는 것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진짜 어려워지는 것
예전에는 "만드는 능력"이 희소했다. 아이디어가 있어도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적었으니까.
이제는 누구나 만들 수 있다. 그러면 희소해지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만들지 않을 것인가를 판단하는 능력이다.
수많은 아이디어 중에서 진짜 필요한 것을 골라내는 눈. 만들 수 있지만 만들지 않기로 결정하는 절제. 열 개를 만드는 대신 하나를 제대로 유지하는 끈기.
결국 매일 꺼내 먹는 반찬은 두세 개다. 나머지는 있어도 없어도 모른다.
만들기 전에 물어야 할 것
AI가 만드는 비용을 거의 0으로 만들어버린 시대에,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바뀌었다.
"이걸 만들 수 있을까?"가 아니라, "이걸 만든 다음에도 계속 쓸까?"
그 질문에 확신이 없다면, 아마 만들지 않는 것이 만드는 것보다 나은 선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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